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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연립주택의 시대, 붐과 붕괴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산업화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급격한 도시화를 경험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과 함께 공업화가 본격화되었고, 농촌 인구는 대거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서울의 인구는 1970년대 초반에 이미 500만 명을 돌파했고, 거주할 공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당시 주택 보급률은 60%대에 불과했고, 도시 곳곳엔 무허가 판잣집이 무분별하게 들어섰다. 이는 도시 미관뿐만 아니라 안전과 위생, 치안 등 사회 전반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도시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체계적인 도시 관리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주택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 변화의 중심에 등장한 것이 바로 ‘연립주택’이었다. 단독주택과 아파트 .. 2025. 4. 12.
재건주택, 전쟁 이후 서울의 ‘임시방편’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폐허가 된 서울은 다시 한 번 주거 위기에 직면했다. 이미 해방 이후 판잣집으로 포화 상태에 이르렀던 도시 공간에 수백만 명의 피난민과 실향민이 몰리면서 주택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서울은 단순히 ‘집이 없는’ 수준을 넘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조차 보장되지 않는 비정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공공주택’을 대규모로 공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재건주택’이다. 재건주택은 말 그대로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 주택’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국가 주도의 최초 대량 공급형 주택이라는 점에서 한국 주거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이 주택은 구조적·사회적으로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임시방편’에 가까운 역할에.. 2025. 4. 12.
해방 후 판잣집, 주거의 위기와 생존의 공간 1945년 광복은 조선에게 자유와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모든 사회 기반이 붕괴된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일제강점기에 남겨진 공공시설과 관사들은 급속히 사유화되거나 무허가로 점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구 폭증을 감당할 만큼의 주택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서울은 순식간에 수십만 명이 모여든 거대한 임시 거주지로 변모하게 된다. 그 중심에는 바로 ‘판잣집’이 있었다. 이는 단순한 가건물이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 도시 주거의 가장 밑바닥에서 사회를 지탱했던 생존의 흔적이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 붕괴된 주거 질서광복 직후 서울의 인구는 약 90만 명에서 1949년엔 150만 명을 돌파했고, 한국전쟁 직후인 .. 2025. 4. 12.
일제강점기 양옥의 등장과 모던보이의 집 1910년대 초, 서울의 골목길을 걷던 조선 사람들은 낯선 건축물과 마주하게 된다. 낡은 기와집과 초가 사이로 등장한, 시멘트 벽과 창문틀, 뾰족 지붕의 서양식 주택은 마치 외국 영화 속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 주택은 조선 시대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었고, 한국 주거문화에 근대성(modernity)을 처음으로 끌어들인 상징이기도 했다.바로 양옥, 즉 서양식 주택의 등장이었다. 그 공간 안에서는 아침마다 빵 냄새가 나고, 거실엔 피아노와 스탠드가 놓였으며, 복장도 사고방식도 달라진 사람들이 살았다.  양옥의 시작: 제국의 흔적, 혹은 새로운 질서양옥(洋屋)은 문자 그대로 서양식 건축 양식을 따른 주택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모양의 차이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전통 한옥은 마.. 2025. 4. 11.
도시 속 다세대 주택과 빌라의 탄생 한국의 도시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단어, 바로 ‘아파트’다. 하지만 도시 주거의 흐름을 면밀히 살펴보면, 아파트만큼이나 오랜 시간 도시의 빈틈을 메워온 존재가 있다. 바로 다세대 주택과 빌라다.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서울과 수도권 곳곳의 주거를 구성해 온 이 유형은, 대단위 개발 이전의 도시 주택 실험이자,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현실적 대안이었다. 지금은 ‘노후화’ ‘범죄율’ ‘투자 사기’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씌워졌지만, 한때는 많은 이들에게 내 집 마련의 첫 희망이었고, 지금도 도시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급변하는 도시, 인구와 주택의 불균형1970년대 후반, 한국은 고도 성장기를 지나며 본격적인 도시 집중화를 맞이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는 매년 수십만 명의 인구가 유.. 2025. 4. 11.
기와집과 한옥, 공간에 담긴 조선의 삶 “한옥”이라는 말만 들어도 어떤 이는 곧장 고즈넉한 마루와 대청, 창 너머로 보이는 정원을 떠올린다. 또 어떤 이에게는 단단하고 곧은 기둥, 기와가 얹힌 처마 끝의 곡선, 햇살이 머무는 마당이 떠오를지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옥은 단순한 옛날집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시대가 만들어낸 삶의 질서와 미학의 집합체였다. 초가집이 민초들의 생활 기반이었다면, 기와집은 유교적 가치관, 신분 질서, 자연과의 조화를 구현한 정수였다. 오늘날 아파트와 오피스텔, 아파텔 같은 주거 형태가 편의성과 경제성 중심으로 진화했다면, 조선의 기와집은 인간과 가족, 사회와 자연이 어떻게 균형 있게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신분과 자원의 경계선조선시대의 주택은 명확한 신분질서를 반영.. 2025.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