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산업화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급격한 도시화를 경험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과 함께 공업화가 본격화되었고, 농촌 인구는 대거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서울의 인구는 1970년대 초반에 이미 500만 명을 돌파했고, 거주할 공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당시 주택 보급률은 60%대에 불과했고, 도시 곳곳엔 무허가 판잣집이 무분별하게 들어섰다. 이는 도시 미관뿐만 아니라 안전과 위생, 치안 등 사회 전반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도시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체계적인 도시 관리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주택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 변화의 중심에 등장한 것이 바로 ‘연립주택’이었다. 단독주택과 아파트 사이, 중간 단계에 위치한 이 새로운 주거 형태는 도시민의 현실적 욕망과 정부 정책의 교차점에서 태어난 과도기적 주거 모델이었다.
인구 집중과 ‘주거 혁신’의 시도
정부는 도시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주택 공급 확대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1972년부터 추진된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과 같은 국책사업이 추진됐고, 이는 민간 건설업체를 적극 유도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이와 함께 당시 도입된 주택자금 지원제도는 연립주택 공급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립주택은 좁은 땅에 여러 세대를 수용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주목받았으며, 당시 서울 도심의 땅값 상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지을 수 있었다. 보통 23층 규모로 지어졌으며, 각 층마다 12가구가 거주하도록 설계되었다. 일부는 정식 허가를 받아 시공되었지만, 상당수는 소규모 건축업자들이 간이 설계로 지은 경우가 많았다. 시공 당시 건축법의 규제가 지금보다 훨씬 느슨했기 때문에 설계의 일관성이나 안전 기준은 천차만별이었다. 연립주택은 도심과 가까운 위치, 부담 없는 가격, 일정 수준의 독립성을 제공하면서 당시 신혼부부나 도시 근로자들에게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붐의 정점, 그리고 드러난 구조적 한계
1970년대 중반, 연립주택은 서울과 수도권 외곽에서 본격적인 붐을 맞았다. 홍제동, 신림동, 장위동, 수유동 등지에는 연립주택 단지가 우후죽순 들어섰고, 광고에서도 ‘새로운 도시인의 삶’, ‘근대적 주거 문화의 출발’ 같은 문구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붐은 이내 구조적 문제에 부딪힌다. 급격한 공급 속도에 비해 품질 관리는 매우 부족했다. 많은 연립주택이 설계 기준조차 지키지 않은 채 시공되었고, 방음은커녕 벽 한 장 사이로 모든 생활소음이 그대로 들릴 정도였다. 일반적인 평면 구조는 방 2개와 좁은 거실, 부엌과 욕실이 모여 있는 형태였으며, 창이 적어 채광과 환기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특히 연탄보일러가 주로 사용되었는데, 배기 구조가 부실한 경우 일산화탄소 중독 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복도식 구조로 인해 사생활 침해나 이웃 간 마찰도 많았고, 결국 입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담을 쌓고, 창문을 틀어막는 식의 ‘반공동체적 개조’가 이뤄졌다. 옥상에는 세탁기, 화분, 창고, 때로는 닭장을 두는 일도 있었고, 이로 인해 건물 전체의 안전성과 위생이 점점 악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연립주택은 ‘값싸고 불편한 집’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고, 주거 선호도는 빠르게 하락하게 된다.
복도와 골목, 기억 속 공동체의 온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립주택이 남긴 생활의 풍경은 도시화 초기의 소중한 흔적이다. 비록 열악하고 불편한 구조였지만, 복도와 계단, 옥상과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어른들의 담소 공간이었다. 겨울이면 연탄을 나르기 위해 서로 힘을 합쳤고, 김장을 담그는 날이면 층간·세대 간 반찬이 오갔다. 연탄보일러가 꺼질까 봐 새벽에 확인하러 다니던 이웃들, 복도에 붙어있던 연탄 배달 스티커, 철제 우편함에 꽂힌 전단지와 계란 두 판까지, 연립주택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삶의 합’이었다. 특히 당시에는 단독주택처럼 완전히 독립된 생활이 어려운 구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안에서 협력과 연대, 갈등과 화해가 일상처럼 이뤄졌다. 아침마다 들리는 이웃의 기침 소리, 복도를 따라 울려 퍼지던 라디오 소리, 공동 수도꼭지 앞에서 줄 서서 물 받던 풍경까지, 그 모든 것이 도시 초창기 서민 주거의 상징이었다.
1980년대 이후, 아파트 공급이 본격화되며 연립주택은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대형 건설사들이 주도하는 고층 아파트는 더 나은 편의시설, 설계 품질, 사회적 위신을 제공했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파트로 이동해갔다. 남겨진 연립주택은 노후화되며 도시의 슬럼지대로 전락하거나 재건축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공간들이 도시재생의 주요 자원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마포구 창전동 등에서는 오래된 연립주택을 리모델링하여 청년주택, 예술가 레지던시, 공유 오피스 등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부산 감천동처럼 문화마을로 탈바꿈한 사례도 있다. 이는 단지 물리적인 건축물의 재활용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고 계승하려는 노력이다. 연립주택은 건축적으로 보면 단독주택과 아파트 사이의 과도기적 실험이었지만, 주거정책의 흐름에서는 현실을 반영한 중요한 실천이었으며, 지금도 ‘중간 주거형태’에 대한 가능성을 재조명받고 있다. 특히 최근 1~2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연립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소형 공동주택들이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연립주택은 짧은 시간 동안 대도시 주거의 핵심 모델이었던 공간이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등장했고, 시대의 속도에 밀려 사라졌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었다. 비록 단점도 많았지만, 도시에 처음 정착한 이들에게 연립주택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출발점이었다. 복잡하고 불완전한 구조 안에서도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갈등을 해소하며 공동체를 일궈나갔다. 오늘날의 아파트, 주상복합, 공유주택 등 다양한 주거 형태는 모두 이런 시행착오의 연장선상에 있다. 연립주택은 도시 주거의 역사에서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으며,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어떤 집에서,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가?” 이제, 그 대답은 과거 속 실험에서 배운 교훈 위에 쌓아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