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초, 서울의 골목길을 걷던 조선 사람들은 낯선 건축물과 마주하게 된다. 낡은 기와집과 초가 사이로 등장한, 시멘트 벽과 창문틀, 뾰족 지붕의 서양식 주택은 마치 외국 영화 속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 주택은 조선 시대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었고, 한국 주거문화에 근대성(modernity)을 처음으로 끌어들인 상징이기도 했다.
바로 양옥, 즉 서양식 주택의 등장이었다. 그 공간 안에서는 아침마다 빵 냄새가 나고, 거실엔 피아노와 스탠드가 놓였으며, 복장도 사고방식도 달라진 사람들이 살았다.
양옥의 시작: 제국의 흔적, 혹은 새로운 질서
양옥(洋屋)은 문자 그대로 서양식 건축 양식을 따른 주택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모양의 차이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전통 한옥은 마당 중심, 자연 친화적 배치, 방 중심 구조였지만, 양옥은 복도 중심, 기능 분리, 폐쇄형 구조라는 완전히 다른 주거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조선이 개항한 19세기말 이후, 그리고 일제가 식민 통치를 본격화한 1910년대 이후부터였다. 처음에는 주로 일본인 관료나 상인, 외국인 선교사들이 거주했으며, 건축 양식도 일본식 ‘와요 혼코(和洋混構, 일본+서양식 혼합)’ 형태가 주류를 이뤘다. 서울 정동, 이화동, 명동 등지에는 붉은 벽돌로 된 2층집, 아치형 창문, 베란다와 유리창이 달린 집들이 속속 들어섰다. 이는 단순한 건축의 변화가 아니라, 권력의 상징이자 새로운 문명 질서의 시각화였다. 길거리에서는 ‘조선 사람의 집’과 ‘문명인의 집’이 명확히 구분됐고, 이 구조적 위계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도 깊이 박히게 된다.
특히 양옥의 내부 구조는 전통 가옥과는 전혀 달랐다. 대부분의 양옥은 1층에 응접실과 식당, 2층에 침실을 배치했고, 입구에는 작은 현관문과 초인종, 유리창과 커튼, 그리고 전기 조명과 수세식 화장실이 함께 구성돼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충격'과도 같은 새로운 공간 경험이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 공간이 바꾼 라이프스타일
1920~30년대는 조선이 근대 도시의 양식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양옥은 단지 외관만 다른 집이 아니라, 새로운 생활 양식의 실험실이기도 했다.
서울 종로, 충무로 일대에서는 당시 ‘모던보이(모보)’와 ‘모던걸(모걸)’이라 불리던 청년들이 등장하며, 새로운 주거문화가 형성됐다.
이들이 거주하던 양옥은 대부분 거실-식당-침실이 분리된 공간, 서양식 가구(소파, 테이블, 장식장)와 함께 생활 방식도 서구화된 모습이었다. 밥 대신 빵을 먹고, 좌식 대신 입식 생활을 하며, ‘방’ 중심이 아닌 ‘공간 기능’ 중심의 집 구조를 채택했다. 양옥 속에는 축음기, 전화기, 타자기, 라디오 같은 새로운 문명의 도구들이 있었고, 이는 곧 그 집에 사는 사람의 ‘근대성’을 나타내는 요소가 됐다. 또한, 잡지 《별건곤》이나 서양 연극, 재즈 음악의 유행도 양옥과 어울리는 ‘모던한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단지 새로운 공간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맞춰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꿔갔다. 양옥은 단순히 집이 아니라, ‘모던’이란 개념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상징이었다.
경성의 도시계획과 근대 주거지구의 탄생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경성(서울)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그 중심에는 ‘근대적 도시 공간 정비’와 함께, 새로운 주거지구 조성이 있었다. 일본은 1910년대 후반부터 경성의 주요 지역에 구획정리사업을 시행하고, 서양식 혹은 일본식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정동, 후암동, 이화동, 혜화동, 성북동이다. 이들 지역에는 대개 2층짜리 벽돌집, 유리창, 폐쇄형 정원이 딸린 양옥들이 들어섰고, 전기, 수세식 화장실, 실내 수도, 유선 전화선 등이 도입되며 ‘근대 도시인’의 생활을 구현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양옥들이 대부분 정치·경제 권력자 혹은 문화 지식인에게 집중됐다는 것이다. 시인 이상이 거주했던 후암동 양옥, 독립운동가 김규식이 살던 정동의 가옥 등은 양옥이 단순한 주거를 넘어 지식과 문화의 상징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양옥은 상류층과 일본인 전유물이 아닌, 서서히 일반 조선인들에게도 퍼지기 시작한다. 특히 건축 자재와 기술의 국산화, 그리고 서울 외곽 주거지 확장이 가속화되면서 ‘반양옥’ 또는 ‘양옥풍 한옥’이 등장했다. 이 주택들은 외관은 양옥처럼 보이지만 내부 구조는 여전히 온돌과 좌식 중심인 절충형으로, 당시 조선인들의 기존 주거 습관과 새로운 주거 형태의 타협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예컨대 거실에는 입식 소파가 있었지만, 안방에는 여전히 온돌과 요가 깔려 있었고, 식사는 좌탁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양옥에 대한 반감도 분명 존재했다. 일제의 상징, 이질적인 구조, 외래문화라는 인식 때문에 한옥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함께 있었다. 조선건축회나 문화계 일각에서는 “양옥은 인간미가 없다”, “마당이 없는 집은 집이 아니다”라는 문화적 저항과 비판이 일기도 했다.
양옥은 조선 주거사에 있어 이질적이고 단절적인 형태였지만, 동시에 한국 현대 주거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단순히 벽돌과 창문만 본 게 아니라, 삶의 방식이 어떻게 공간에 따라 바뀌는지를 목격했다. 양옥은 단지 외국의 것을 모방한 구조물이 아니라, 조선의 전통과 충돌하고, 조화를 시도하며, 결국 전통에서 현대 주거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몇몇 일제시기 양옥들(정동, 혜화동, 성북동 골목 속 조용히 자리한 집들)은 단순한 문화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 집들은 한국 주거 문화의 혼란과 실험, 그리고 변화를 온몸으로 겪은 기록물이다. 현대에는 일부 양옥이 리모델링되어 카페, 북스테이, 전시 공간 등으로 활용되며 ‘근대 주거 유산’으로서 재조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