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광복은 조선에게 자유와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모든 사회 기반이 붕괴된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일제강점기에 남겨진 공공시설과 관사들은 급속히 사유화되거나 무허가로 점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구 폭증을 감당할 만큼의 주택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서울은 순식간에 수십만 명이 모여든 거대한 임시 거주지로 변모하게 된다. 그 중심에는 바로 ‘판잣집’이 있었다. 이는 단순한 가건물이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 도시 주거의 가장 밑바닥에서 사회를 지탱했던 생존의 흔적이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 붕괴된 주거 질서
광복 직후 서울의 인구는 약 90만 명에서 1949년엔 150만 명을 돌파했고,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엔 200만 명을 훌쩍 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고급 주택과 관사들이 비워지면서, 이 공간은 귀환 동포와 실향민, 농촌 출신 이주민들이 무단 점거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한정돼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에도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다. 이때 생겨난 것이 바로 나무판자와 양철, 천막 등으로 급조한 주거 형태, 이른바 ‘판잣집’이었다. 이 주택은 보통 불법 점거 형태로 산비탈, 하천변, 철도 주변 등 도시의 경계 지대에 무질서하게 지어졌으며, 기본적인 위생과 안전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당시엔 '집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비가 오면 지붕은 새고, 겨울에는 바람이 틈새로 들이쳤으며, 여름철엔 침수와 말라리아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도 자녀를 키우고, 생업을 이어가며 어떻게든 일상을 이어갔다. 주거의 기준이 아닌 생존이 우선이던 시절, 판잣집은 어쩌면 유일한 선택지였다.
‘임시거처’의 영속화, 도시 빈민의 고착
판잣집은 처음에는 임시적 공간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정부나 사회 시스템이 그들을 위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점점 상시적 주거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 1950년대 후반에는 서울 시내에서만도 약 15만 호 이상의 무허가 판잣집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 전체 주택 수의 약 30%를 차지했다. 이러한 판잣집 밀집지역은 주로 도시 외곽 언덕이나 비탈길, 구릉지대에 형성되었고, 그 안에서 나름의 커뮤니티와 생존 방식이 만들어졌다. 특히, 이들 지역은 전통적인 ‘마을’ 개념과 달리 혈연과 지연이 아닌, 생존 기반의 ‘생활 공동체’로 기능했다. 사람들이 모여 물을 길어오고, 연탄을 나르고, 불을 끄기 위한 순번제를 운영하며, ‘없는 가운데서도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간 것이다. 또한, 판잣집 내부 공간은 단출했지만, 오히려 가족 간 유대와 공동체의 밀착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공간이 협소할수록 소통과 협력이 절실해졌고, 이는 판잣집 사회가 의외로 끈끈한 이유 중 하나였다. 1950~60년대의 서울은 단지 고층 건물이 없는 도시가 아니라, 이런 형태의 주거가 주류였던 현실 그 자체였다.
주거 정책의 공백과 비공식적 공간의 확장
정부는 당시 경제 재건에 급급했고, 주거 정책은 사실상 사각지대에 머물렀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서울시 무허가 건물 실태조사’가 실시되었지만, 실질적인 대책은 없었다. 오히려 무허가 철거를 추진하려다 주민 반발과 갈등이 폭발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 결과 판잣집은 무허가 상태로 몇십 년씩 존속되는 경우도 많았다. 일부는 전기나 수도조차 공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십 가구가 공용 화장실과 우물 하나로 생활해야 했고, 화재나 붕괴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판잣집 주민들은 도시 경제의 저변을 떠받치고 있었다. 막노동, 시장 상인, 청소부, 구두닦이 등 도시 필수 노동을 수행하던 이들이 바로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판잣집은 제도권 밖의 공간이었지만, 도시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구성원이 존재하는 ‘비공식적 도시’의 일부였다. 재개발과 도시 미관 개선의 이름으로 철거 대상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도시 전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동력원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언론과 공공 담론에서 판잣집은 ‘도시의 슬럼’으로 묘사되었지만, 그 안에는 단지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는 열악했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질서와 따뜻함, 인간미를 만들어냈다. 어떤 이들은 대문 대신 이웃과의 약속으로 집을 지켰고, 아이들은 다 함께 골목을 놀이터 삼아 자라났다. 연탄을 나누고, 공동 우물을 사용하며, 김장철이면 서로 음식을 나누던 풍경은 단순한 가난 이상의 풍요를 상징했다. 특히 많은 경우 여성들이 이 공동체의 실질적 운영 주체였다. 빨래, 음식, 아이 돌봄, 심지어 질병 간호까지 서로 돌보며 유지되던 이 판잣집 사회는 도시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빈민이라는 이름 아래 낙인찍혔지만, 실상은 강한 자립성과 생존의 지혜를 갖춘 사람들로 구성된 ‘현대 도시 형성의 주역’이었다. 오늘날의 도시 기반은 어쩌면 그들 없이는 성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해방 후 판잣집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 아니라, 한국 도시화의 그림자이자 필수적인 배경이었다. 주거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다면, 판잣집은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한 사람들의 집합적 의지’였다. 지금은 대부분 철거되어 자취를 감췄지만, 그 시절의 삶과 구조는 오늘날에도 서울의 지형과 공간 구조, 사람들의 이주 경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주거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만드는 중요한 질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도시의 가장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 사람들, 그들의 주거 이력 속에는 단순한 공간 변화가 아니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사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피어난 공동체 정신, 공간을 넘어선 연대는 지금의 도시 주거가 잃어버린 가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음 글에서 그 판잣집 위에 지어진 ‘재건주택’이라는 임시방편 속으로 들어가, 전후 한국 사회가 주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려 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