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시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단어, 바로 ‘아파트’다. 하지만 도시 주거의 흐름을 면밀히 살펴보면, 아파트만큼이나 오랜 시간 도시의 빈틈을 메워온 존재가 있다. 바로 다세대 주택과 빌라다.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서울과 수도권 곳곳의 주거를 구성해 온 이 유형은, 대단위 개발 이전의 도시 주택 실험이자,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현실적 대안이었다. 지금은 ‘노후화’ ‘범죄율’ ‘투자 사기’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씌워졌지만, 한때는 많은 이들에게 내 집 마련의 첫 희망이었고, 지금도 도시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급변하는 도시, 인구와 주택의 불균형
1970년대 후반, 한국은 고도 성장기를 지나며 본격적인 도시 집중화를 맞이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는 매년 수십만 명의 인구가 유입되었고, 이는 심각한 주택 부족 문제로 이어졌다.
정부는 대규모 택지 개발과 아파트 단지 조성에 나섰지만, 공공 개발의 속도는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 시기, 도심과 근교 지역에서는 기존 단독주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여러 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다세대 주택 형태의 건물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런 주택들은 3층 이하로 지어져 건축법상 단독주택의 분류를 유지하면서도, 세입자 여러 명을 받을 수 있는 효율적인 구조였다. 초기에는 소규모 주택 임대사업자들이 주도했고, 도시 외곽의 유휴부지 혹은 재개발 전 낙후지역에 집중적으로 공급되었다.
특히 1981년, 건축법상 다세대 주택의 명확한 정의가 도입되면서, 이 유형은 하나의 주거 상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빌라의 시대, 중산층을 위한 도시형 아파트
1980년대 중후반, ‘빌라(Villa)’라는 이름의 주거 형태가 급부상한다. 이 말은 원래 유럽식 단독주택을 의미하지만, 한국에서는 저층 소규모 공동주택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되었다. 특히 강남 개발이 가속화되고, 수도권 외곽에도 도시계획이 확장되면서, 아파트로 대체되지 못한 자투리 땅에 작은 단지 형태의 빌라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빌라는 외관상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며, 파스텔톤 외벽, 아치형 창문, 발코니, 철제 난간 등의 유럽풍 디자인을 차용해 아파트와 차별화되었다. 일부는 복층 구조, 전용 마당, 테라스 등을 갖추며 ‘작지만 품격 있는’ 주거를 내세웠다.
이 시기의 빌라는 아파트보다는 저렴하지만 단독주택보다는 집단적이고 효율적인 주거 대안으로, 중산층 신혼부부와 자영업자 층에게 높은 인기를 끌었다. 강남·강북, 수도권 곳곳에 ‘OO빌라’ ‘XX하우스’라는 이름의 주택들이 빠르게 들어섰고, 분양제도와 대출 혜택을 등에 업고 빌라 시장은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지나친 공급과 규제 미비로 인해 분양가 부풀리기, 품질 저하, 투기성 매입이 발생하면서 점차 신뢰 하락의 길을 걷게 된다.
소유와 임대의 혼재: 다세대 주택의 양면성
다세대 주택은 초기에는 ‘자가 거주 + 임대’라는 수익 구조를 갖춘 하이브리드 주택 형태로 환영받았다. 건물주가 1층에 거주하고, 위층을 임대하면서 일정한 수입을 얻는 구조였다. 하지만 점점 더 투자자 중심의 수익형 모델로 전환되면서, 주거의 질보다는 수익률이 우선시 되기 시작한다. 건물은 작지만 방을 최대한 많이 쪼개거나, 불법 증축으로 세대수를 늘리는 방식이 유행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주차난, 층간소음, 화재 위험 등 복잡한 문제를 낳았다. 게다가, 수익 목적의 다세대 주택은 대부분 임차인을 고려하지 않은 구조였기 때문에, 세입자 입장에서는 좁고 불편한 구조 속에서 높은 임대료를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로 인해 다세대 주택은 '질 낮은 임대주택'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점점 외면받기 시작한다. 특히 신축 빌라 분양 사기나 ‘깡통전세’ 문제는 이 주택 유형의 신뢰도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세대 주택은 여전히 도시에서 가장 많은 주택 유형 중 하나다. 서울에서만 전체 주택 중 약 25% 이상이 다세대 주택이며,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즉, 현실적으로 가장 흔한 집이지만, 가장 소외되고 낙인찍힌 주거 유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아파트 중심의 대규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빌라와 다세대 주택은 점차 구시대의 유산처럼 취급된다.
신축 빌라는 주로 재개발 예정지나 비정형 부지에서만 공급되고 있으며, 그마저도 투기 목적이 강한 경우가 많다.
특히 ‘신축 빌라’는 최근까지 깡통전세 사기의 주범으로 지목되며, ‘내 집 마련의 시작’이라는 과거의 인식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2인 가구가 증가하고, 고가의 아파트 접근성이 낮아지면서 다세대 주택은 여전히 서민 주거의 핵심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소형 주택 리모델링, 도시형 생활주택, 쉐어하우스 등 새로운 형태의 도시 주거 실험들이 기존 다세대 주택을 리디자인하여 사용하고 있다.
특히 마을형 도시재생 프로젝트에서는 기존 다세대 주택을 리모델링하고 공공 디자인을 접목하여, 커뮤니티 중심의 거주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시도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즉, 이들은 더 이상 ‘낡고 위험한 집’이 아니라, 도시가 다시 실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가는 중이다.
다세대 주택과 빌라는 한국 도시 주거의 현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한 주거 형태다. 이들은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태어났고, 자생적으로 성장했으며, 때로는 왜곡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도시가 끊임없이 실험하고, 적응하고, 새로운 구조를 모색했던 흔적이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는 아파트 외의 주거 형태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는 하나의 유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낡은 빌라를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거나, 다세대 주택을 커뮤니티 중심으로 개조하는 일은 단순한 재개발이 아닌 주거 다양성의 실천이다.
다세대 주택과 빌라는 단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도 변화 중인 도시 주거의 실험실이자, 미래의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