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경제 수준은 한층 높아졌고 국민들의 주거 욕구도 질적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더 이상 최소한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 ‘내 집’에 대한 이상과 ‘독립된 공간’에 대한 욕망이 커져갔다. 그 시기 주목받은 것이 바로 ‘단독주택’이다. 담장이 있고, 마당이 있으며, 층간소음 걱정 없이 가족만의 리듬대로 살아갈 수 있는 단독주택은 당시 중산층이 꿈꾸던 가장 이상적인 주거형태였다. 아파트가 공급되기 전 또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서울 외곽 또는 수도권으로 이주하여 단독주택을 짓고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단독주택의 유행은 단지 낭만적인 선택만은 아니었다. 도시계획의 한계, 교통 인프라의 미비,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도시 확장의 이면과 그림자를 함께 만들어냈다.
내 집을 짓는다는 것, 건축주의 시대
1980년대 후반, 경제 성장과 함께 개인 자산이 축적되기 시작하면서 ‘집을 짓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단독주택은 아파트와 달리 건설사가 일괄 공급하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건축주 스스로 부지를 구입하고, 설계를 의뢰하고, 시공업체와 공정을 조율해야 했다. 번거롭고 복잡한 과정이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취향을 주택에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이 있었다. 이 시기 지어진 단독주택들은 다양한 건축 스타일을 보여주며 도시 외곽 지역의 풍경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스페인풍 붉은 기와지붕, 돌출형 발코니, 유럽식 벽돌 외관, 심지어는 대문 앞 야자수 조경까지, 당시의 단독주택은 ‘누가 더 예쁘게, 고급스럽게 지었는가’에 대한 일종의 경쟁장이기도 했다. 마당에 작은 텃밭이나 화단을 가꾸는 것은 기본이었고, 차고를 갖춘 집은 일종의 사회적 지위로 여겨졌다. 건축주의 상상력과 라이프스타일이 직접 반영된 이 시기의 주택들은 지금도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 지역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서울을 벗어나다, 도시 확장과 단독주택지의 탄생
단독주택의 주요 입지는 서울 도심이 아니었다. 높은 땅값과 부족한 부지로 인해, 대부분의 단독주택은 서울 외곽 또는 경기 지역에서 많이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강서구 화곡동, 양천구 신월동, 은평구 불광동, 노원구 중계동, 그리고 성남 분당, 고양 일산 등이었다. 이곳들은 당시엔 ‘서울 외곽’ 또는 ‘신도시 예정지’ 정도로 인식되었지만, 단독주택이 대거 들어서면서 ‘조용한 주거지’로 자리 잡게 된다. 다만 이러한 확산은 도시 인프라보다 먼저 주거 수요가 퍼져나간 결과이기도 했다. 학교, 병원, 상점, 대중교통 같은 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독주택 단지가 먼저 형성되었고, 주민들은 ‘자연 속 단독주택의 낭만’과 ‘생활의 불편’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출퇴근 시간마다 버스를 세 번씩 갈아타야 했고, 어린 자녀를 위한 유치원이 멀리 있어 불편이 컸다. 동시에 각 단독주택의 형태가 제각각이다 보니 도시계획적인 일관성도 부족했다. 불법 증축이나 담장 설치, 좁은 골목의 주차 문제 등은 단독주택지 특유의 고질병으로 자리 잡았다.
삶의 품격이자 관리의 부담
단독주택은 아파트에 비해 ‘삶의 자유도’가 높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그 모든 공간을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도 함께 따른다. 정원 관리, 외벽 도색, 보일러와 수도 점검, 지붕 보수 등은 모두 주인의 몫이었고, 이는 비용과 시간, 노동을 의미했다. 특히 노후되기 시작하면서 단독주택은 아파트보다 더 많은 유지보수가 필요했고, 혼자 사는 고령자들에게는 부담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아파트 단지의 품질과 편의성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단독주택은 점차 ‘불편한 집’이라는 이미지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계단, 협소한 주차 공간, 공용 관리가 없는 불편함은 고급스러움보다는 불편함을 더 먼저 떠오르게 했다. 이와 함께 방범 문제나 소음 문제도 커졌다. 아파트는 관리실과 경비, CCTV 등의 시스템이 갖춰졌지만 단독주택은 외부로 노출된 구조 탓에 침입이나 도난의 위험도 높았다. 특히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낮 시간대 빈집이 많은 구조는 심리적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단독주택지의 무질서한 확장은 도시계획의 한계와 맞닿아 있었다. 구획정리 없이 개인이 부지를 매입해 짓는 방식은 개별 주택의 개성을 살릴 수 있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관리와 발전이 어려운 구조였다. 공공 기반시설이 미비한 지역에서는 쓰레기 처리, 배수 문제, 도로 정비 등 모든 것이 수시로 문제로 떠올랐고, 지자체 차원의 일괄적인 정비도 쉽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흐르며 단독주택지는 ‘재개발 대상지’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이는 지역 가치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많은 단독주택 단지가 슬럼화되었고, 불법 건축물 밀집 지역이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져 지역 발전에 제약이 되었다. 반면 일부 지역은 고급 단독주택 단지로 관리되며 지금까지도 자산 가치가 유지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한남동, 평창동, 성북동 등은 여전히 부촌으로 남아 있으며, 단독주택이 상징하는 ‘프라이빗한 삶’은 고소득층의 선호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단독주택은 지역과 계층에 따라 명암이 극명하게 갈리는 주거 형태이기도 하다.
단독주택은 분명 그 시대 중산층이 꿈꾸던 낭만의 상징이었다. ‘내 땅, 내 집, 내 공간’이라는 개념은 아파트가 제공할 수 없는 깊은 소유감과 만족감을 주었다. 동시에 단독주택은 한국 도시화 과정에서 여러 실험과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장치이기도 하다. 관리의 어려움, 인프라의 미비, 도시계획의 부재는 단독주택이 가지는 구조적 취약점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도시가 어떤 방식으로 확장되고 정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도 얻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단독주택은 특정 계층의 선호 주거형태로 남아 있으며, 일부는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찾고 있다. 도시의 미래를 설계함에 있어, 우리는 단독주택이 남긴 흔적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집이란 공간은 단순히 살아가는 곳인가, 혹은 삶의 방식을 실현하는 무대인가?" 그 질문은 오늘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