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오르다 보면, 언덕 위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다. 마치 달처럼 높이 떠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 ‘달동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산업화와 도시 집중화가 본격화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갈 곳을 잃은 채 산비탈을 향해 올라갔다. 도시는 그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 틈새에 생긴 것이 바로 달동네였다. 달동네는 한국 도시화의 또 다른 얼굴이자, 빈곤과 희망이 공존하던 독특한 주거 공간이었다. 지금은 철거되거나 재개발되어 사라진 곳이 많지만, 여전히 일부 지역에는 그 기억과 흔적이 남아 있다. 달동네는 단순히 낙후된 공간이 아니라, 시대의 그늘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낸 삶의 흔적이다.
도시화의 그늘에서 태어난 마을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농촌을 떠난 이주민들은 대도시, 특히 서울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정부의 도시 계획은 급격한 인구 유입을 감당할 수 없었고, 주거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곳은 서울 외곽의 산비탈이었다. 토지 소유권은 없었지만 ‘비어 있는 땅’이었고, 돈이 없어도 집을 지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달동네는 판잣집과 블록 구조의 조립식 주택들이 주를 이루며 점차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수도, 전기, 하수도 등 기본 인프라조차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삶의 터전을 일궜다. 특히 인근에 공장지대가 있거나 도심 접근성이 괜찮은 지역은 더 빨리 달동네가 형성되었고, 자연스럽게 공동체도 생겨났다. 초기에는 고향에서 함께 올라온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서로를 의지했다. 달동네는 비공식적이지만 강력한 생활 기반이었고, 그 속에는 단순한 빈곤을 넘어선 복잡한 삶의 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고단했지만 정 많던 일상
달동네의 하루는 고단했다. 수도가 없어 공동 수도에서 물을 길어 나르고, 재래식 화장실은 골목 끝에 하나뿐이었다. 겨울이면 연탄을 이고 언덕을 오르내려야 했고, 여름이면 폭우에 무너지는 집을 보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인간관계와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었다. 이웃 간에 반찬을 나누고,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며 자랐다. 생계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도심에서 가사노동을 하거나, 시장에 나가 좌판을 펼치는 식으로 이어졌다. 어린아이들도 일찍부터 일을 도왔고, 가족 단위의 생존이 공동의 목표였다. 달동네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가족과 공동체의 안식처이자 생계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마을 단위의 크고 작은 의사결정은 자연스럽게 ‘어른들’ 중심으로 이뤄졌고, 주민들 간의 유대감은 높은 편이었다. 물론 범죄나 폭력 등 문제도 존재했지만,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한 힘은 결국 공동체였다. 당시 달동네를 기억하는 이들은 ‘가난했지만 외롭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꺼낸다.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 있었지만, 정서적으로는 오히려 단단한 울타리였던 셈이다.
도시정비라는 이름의 지우개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도시정비 사업은 달동네의 존재를 점점 좁혀갔다. 정부는 주거환경개선과 도시 미관, 그리고 재해 위험 지역 해소라는 명분 아래 달동네를 철거하거나 재개발했다. 일부는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주하게 되었고, 일부는 현금 보상만 받고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다. 문제는 이러한 개발이 주민들의 의견이나 삶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지 오래되고 낙후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사람들은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정비 사업은 물리적 환경을 바꿨지만, 달동네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경험으로 남았다. 특히 영구임대주택으로 이주한 이들은 집은 생겼지만 고립되거나, 기존의 일터와 멀어져 생계에 타격을 입는 경우도 많았다. 개발은 성공적일 수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개인들의 이야기는 종종 지워지곤 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개발 방식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는 이유다. 달동네는 단지 허름한 집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도시 빈민의 삶이 응축된 하나의 역사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변화는 200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다. 달동네는 점차 문화적 상징이 되기 시작했고,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에서 과거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다. ‘건축학개론’이나 ‘미나문방구’ 같은 영화는 달동네의 비좁고 따뜻했던 골목길을 배경으로 삼았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서울 북정마을, 해방촌, 백사마을 같은 장소는 과거의 달동네 흔적을 보존하거나 재해석한 문화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백사마을은 ‘한국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며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뜨거운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가난의 상징이었던 공간이 이제는 정체성과 기억의 공간으로 재조명되는 현상은 매우 흥미롭다. 달동네는 더 이상 숨겨야 할 공간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낸 삶의 현장이며, 그 속에서 형성된 사람들의 연대와 감정은 도시가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가치다. 이러한 움직임은 과거를 복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현재와 미래의 도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단서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달동네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채 성장한 결과로 생겨난 구조였고,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다. 우리가 달동네를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는 과거의 슬픔을 되새기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도시화 과정에서 간과된 인간적인 요소들—공동체, 연대, 생활의 지혜—를 다시 돌아보기 위함이다. 현대의 도시 주거는 점점 고립되고, 개인화되고 있으며,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서로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반면 달동네는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품고 있었다. 오늘날의 도시가 그 가치를 되새길 수 있다면, 달동네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단서가 될 수도 있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지만, 가장 낮은 삶을 살아냈던 그 공간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 걸고 있다—당신은 지금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냐고.